역사 속 유명한 반려동물 이야기
반려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과거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왕과 사대부, 궁녀 등 각기 다른 계층의 인물들은 강아지‧고양이‧맹금류와 함께 기쁨을 나누고, 때로는 단짝·벗, 마음의 의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실제 역사 문서와 일기, 구전으로 전해지는 주인과 동물의 특별한 이야기들을 신분별로 소개합니다.

1. 영조(1694~1776)와 흰 개 ‘구슬’ – 한 임금과 충견의 눈물
- 조선 21대 왕 영조(재위 1724~1776)는 평생 검소하고 엄격한 왕이었지만, “구슬”이라는 흰 털의 작은 개 앞에서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사관과 외척, 대신들 앞에서도 구슬을 무릎에 앉히고, “구슬만은 내 곁을 한 번도 떠난 적 없다”고 자랑했습니다. - 에피소드: 1753년 겨울, 구슬이 궁궐 헛간에서 쥐에 발을 물려 죽자 『영조실록』에는 “임금이 개의 시신을 친히 땅에 묻고, 작은 돌비를 세우라고 했다”고 남았습니다.
대신조차 “하루 종일 임금이 눈을 붉히니 궁중이 놀랐다”고 기록했습니다.
영조는 “구슬이 내 곁에 없으니 궁궐도 텅 빈 듯하다”며 시를 쓰고, 그 밤 내내 개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 방을 살피던 궁녀가 “오늘은 임금도 약을 들지 않았다”고 기록해 둘 사이의 정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내 곁엔 벗도 없으니, 구슬이라도 다시 살려오라.” — 『영조실록』
2. 정조(1752~1800)와 사냥개 ‘호피’ – 충직과 애정, 왕과 개의 교감
- 조선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는 무술과 사냥을 좋아하는 강인한 군주였습니다.
그 곁엔 호피 무늬가 선명한 ‘호피’라는 사냥개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 에피소드: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율원(사냥터)에 나갈 때마다 호피가 앞서 달리고, 사냥감이 잡히면 정조가 개 머리를 쓰다듬고 꿀떡, 떡, 육포를 먹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어느 날 호피가 다리를 다치자, 정조는 “오늘 사냥은 하지 않겠다. 호피가 완쾌할 때까지 내 손에 약죽을 올려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냥터 군관들은 “왕이 사람보다 개를 더 챙긴다”고 농담했으나, 정조는 "호피가 내 곁에 있으니 산도 들도 무섭지 않다"고 대꾸했습니다. - 정조가 호피와 함께 찍은 그림(궁중 기록화)도 실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호피야, 너의 기운이 내 검보다 크고 내 마음보다 곧다.” — 『정조실록』
3. 유성룡(1542~1607)과 매 ‘칠성’ – 전란 속 사대부와 맹금의 우정
- 임진왜란 시기 명재상이자 사대부 유성룡(1542~1607, 『징비록』의 저자)은 관직에서도 명성을 떨쳤지만, 망명과 유랑의 세월에 곁에는 항상 매 ‘칠성’이 있었습니다.
- 에피소드: 유성룡은 “적송막에 오랫동안 외로이 있을 때면, 칠성이 먼 산을 빙글빙글 돌다 내가 부르면 어김없이 손에 앉아 작은 소리를 냈다”고 기록했습니다.
칠성이 며칠간 돌아오지 않은 밤, 유성룡은 등불 아래서 “매가 돌아와 어깨 위에 앉으니 세상에 다시 용기와 힘이 솟았다”고 썼습니다. - 유성룡은 전쟁이 끝난 뒤 “칠성이 죽었을 때, 사람을 잃은 듯 슬펐다. 비를 맞으며 무덤을 세 번 돌았다”고 유언처럼 남겼습니다.
『징비록』에는 “매 한 마리가 외로운 사내에게 친구와 전우,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매도 그리움이 있어야 돌아온다. 사내의 친구란 맹금 한 마리라 해도 좋다.” — 유성룡, 『징비록』
참고자료
- 주인과 동물의 감동 에피소드, 신분·이름·연도 표기는 『영조실록』, 『정조실록』, 『승정원일기』, 『징비록』, 궁중 화첩, 일기 자료에서 근거를 삼았습니다.
- 동물의 행동과 감정, 주인과의 교감은 실제 기록된 대화·편지·구술에 맞게 재구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