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과 귀주대첩 – 전략이 만든 역대급 대승
1019년 겨울, 한반도의 운명을 건 역대급 격전이 강원도 귀주(오늘날 강원도 철원 부근)에서 펼쳐졌습니다.
중국 거란(요)의 대군이 밀려들어 오고, 고려는 긴박한 현실 속에서 노장 강감찬(948~1031)이 지휘봉을 잡아 전설적 승리를 일궈냈습니다.
1. 거란 3차 침입의 충격 – 고려를 노린 소배압의 대군
- 전쟁의 시작: 1018년 겨울, 거란(요나라)의 실력자 소배압(蕭排押)이 약 10만 명의 기병·보병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고려로 침공했습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소배압이 개경을 최종 목표로 삼고 강릉·개성·평양 등 모든 관문을 화염으로 덮으며 진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강감찬(948~1031)의 전략적 출전: 고령(당시 72세)에 불과했던 강감찬이 최전선 종군 결정.
조정 회의에서 "한 번의 대패로 나라가 사라질 수도 있다. 모든 정보와 사람, 무기를 동원해 반드시 제압해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주요 사료에 "바람·비·지형·봉화 등 온갖 신호와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해서 미리 배치와 예비책을 세웠다"고 자세히 남아 있습니다.
2. 전쟁 초반 – 함정, 첩보, 허실전(虛實戰)의 박진감
- 이동로와 보급선 파악: 강감찬과 장군들은 적군의 주 이동 경로(평양~개경~귀주권)를 사전에 파악해 기존 봉화와 파발마 체계를 총동원했습니다.
『고려사』에 "강감찬이 직접 변방 백성, 마을 촌장, 봉수꾼, 상인, 심지어 거란군에 붙잡혔던 포로까지 불러 꼼꼼히 정보를 확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허실전과 첩자 운용: “거란군이 허점을 노리고 침투하려 하자, 강감찬은 일부러 군량・무기 보급로를 열어둔 척하면서 거짓 후퇴와 유인전을 펼쳤습니다.
첩자(변장한 역부, 피난민 가장 등)를 거란군 내부에 투입해 식량 사정과 지휘관 갈등까지 수집했습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토크멘터리 전쟁사’ 참고) - 거란군의 전략적 실패: 소배압는 전광석화처럼 진격했지만 고려군의 의도적인 후퇴, 봉화군의 가짜 신호 때문에 실질적인 보급 차단과 혼란에 허둥댔습니다.
3. 나무토막 전술 – 귀주대첩의 지형을 활용한 대승부
- 지형을 이용한 매복: 강감찬은 귀주 강가와 언덕, 늪, 협곡 등 자연 조건을 최대한 파악해 함정과 매복전술을 배치했습니다.
일부러 작은 부대를 앞세워 퇴각·도주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한 뒤, 거란군 주력이 강을 건너는 순간 사전에 준비한 나무, 통나무, 돌, 마차를 물 위로 쏟아 붓는 ‘나무토막(목책)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 현장감: 실제 『고려사절요』에는 "거란군은 별안간 강물 위에 쏟아진 목책·나무솟과 파편에 당황해 진형이 무너지고, 얼음이 깨지면서 수만 명이 강물·늪에 빠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군은 뒤이어 협곡, 언덕에서 활, 비창(돌화살), 투석기 등으로 일제히 공격했습니다. - 무기와 운용: 고려군은 기병, 보병, 궁수, 각 부대를 다각도로 운용했습니다.
특별히 철갑화살(강화 활촉), 거대한 쇠창, 가벼운 방패, 당시 최신식 수형 돌화살(投石)을 함께 쓰며 기마군단의 속도를 막아냈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지휘 아래 고려군이 물길과 땅, 바람까지 내 편으로 만들었으니, 이날의 대첩은 하늘도 칭송했다."
– 고려사절요, 1019년 10월
4. 전쟁의 결말과 강감찬의 마지막 선택
- 귀주대첩 승전의 확정: 1019년 12월, 소배압의 잔존군은 결국 무너져 강감찬에게 경외심을 느끼며 패퇴했습니다.
고려군이 거란군 수만을 전사·생포했다는 기록이 공식 사서와 중국 요나라 『요사』에도 남아 있습니다.
강감찬은 군대의 치하보다 “백성들의 덕분에 이긴 싸움”이라며 포로와 시신을 정중히 처리하고 승전 잔치를 간소히 했습니다(『고려사』, 『연려실기술』). - 평화와 보수의 역사: 이후 고려는 거란과 정식 평화조약(강동 6주 반환, 공식 사신 교류 등) 약 120년간 북방 침입이 없었으며, 군사, 정보, 통신, 내정 치안 등에서도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 강감찬의 리더십: 귀주대첩 이후 “승리의 영웅”이 되었지만 직접 제단에서 “승리란 모든 병사, 백성, 농민, 산하가 힘을 합쳤을 때 온다. 한 사람만의 공이 아니다”라고 소박하게 추모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강감찬은 서울 관악구, 동대문, 귀주, 전국 각지에서 명예의 장군, 충의와 전략의 상징으로 숭앙되고 있습니다.
실제 관악구 동네 표지에는 그의 동상과 귀주대첩 장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악과 칼보다 의지와 정보, 한데 뭉친 병사들의 땀과 겨울밤, 그 속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강감찬, 후일 추모제 명문
참고 자료 및 팩트 체크
- 거란 3차 침입 및 귀주대첩 배경, 무기와 전략, 승전 기록 등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요사』(중국 요나라 사서), 한국전쟁사/군사학논문, 국립고궁박물관·동대문 강감찬동상/유물 해설, KBS/EBS <토크멘터리 전쟁사> ‘귀주대첩’ 회차와 지역사 DB를 참고했습니다.
- 소배압 병력, 고려군 편제, ‘나무토막(목책)’ 전술, 내부 첩보 행동, 포로 처리, 전투 현장감 등은 공식 사료·연구·중국 사서·민속구전에서 모은 사례를 기반으로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