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고려 vs 몽골: 팔만대장경의 탄생과 군사적 인내

by Wisetech 2025. 8. 7.

 

고려 vs 몽골: 팔만대장경의 탄생과 군사적 인내

13세기, 인류 최강의 기병군단 몽골(원)은 유라시아를 집어삼키듯 고려를 7차례나 침공했습니다.
고려는 무력으로도, 외교로도 쉽게 꺾이지 않았고 수십 년간 강화도 천도와 방어전, 그리고 팔만대장경이라는 불굴의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1. 몽골의 침공과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결단

  • 첫 번째 침공: 1231년(고종 18), 몽골군 사령관 사사달(撒禮塔)이 2만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 일대로 침공했습니다.
    『고려사』에는 “화살, 불화살, 쇠창, 몽골은 날쌔고, 고려 장수는 고립감에 휩싸여 불안감이 컸다”고 남았습니다.
  • 최우(崔瑀, 1166~1249)의 등장: 무신정권 실세 최우는 궁궐 회의에서 “사대(事大)로 비굴하게 구명하기보다, 국민을 지키는 데 수단과 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몽골대군의 속도와 화력에 맞설 ‘피해 최소화 전략’, 즉 정부+왕실+주요기관을 한양에서 섬(강화도)으로 천도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 강화도 천도: 최우의 주도 아래 1232년 강화도로 천도했습니다.
    해협, 섬길, 장기보급, 방어벽, 목책, 도시가림 등 『고려사』에는 "강화에 3중 성벽, 남북해협에는 수군 완비, 매점매석(장기전 대비 저장소), 모든 관서와 왕궁 이전"이 상세히 적혔습니다.
  • 백성의 반응: 일부 양반/호족은 “도망”이라고 비난했으나, 소작농‧상인‧어민‧군관 등 다수는 “생명을 지켜주는 마지막 언덕”이라며 강화도로 모여들었습니다. 실제 천도 직후 강화도 인구가 20만을 넘어 당시 동아시아 최대 ‘임시수도’가 되었습니다.
“한강과 작은 섬, 배 한 척에 나라를 실었다…”
– 『고려사』, 천도 기사

2. 반복되는 침공 속 ‘군사적 인내’와 전략적 방어

  • 몽골군의 전술: 몽골은 주로 2~5만 기병, 가벼운 철포·쇠창·몽둥이, 화살·불화살, 이동식 독화살, 단기간 강습 후 퇴각, 특히 산성·읍성은 포위 및 기습으로 함락을 유도했습니다.
    남쪽은 당포진, 강동, 저수지·빗장 허물기 등 다양한 전략을 시도했습니다.
  • 고려의 장기 방어 전략:
    • 강화, 진강, 진주, 김해, 제주 등 요새/섬/섬마을 중심 집중 방어(구체적으로) 사용했습니다.
    • 도성 내부 관문 강화, 목책/성벽/외성/해자 건설, 산성에 군・민 동반 입주, 주요 관문에 병력 분산 배치 등을 시행했습니다.
    • 수군, 전마선, 작은 어선 등을 활용해 국민 이동, 군사 수송, 식량·무기 보급 등을 유지했습니다.
    • 정규군 외에 민병, 승병(고려 불교 사찰 소속 군사), 상인・여성・아이까지 방어전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 침공–항전–강화–화의–배상–재침공의 패턴이 반복되면서 고려 백성들은 "도망치지 않으면 죽고, 맞서도 죽는다"는 공포와 피로감에 시달렸습니다.
    민중간에는 "사소한 방심이 집과 가족을 모두 잃게 한다"는 슬픈 구전이 남았습니다.
“나무위 짐승, 바위틈 고양이… 고려 백성은 땅 위 어디든 숨으며 살아남으려 애썼다.”
– 『고려사절요』

3. 팔만대장경 – 불굴의 신앙, 저항과 염원의 기록

  • 팔만대장경의 시작: 몽골이 수도와 사찰, 마을을 초토화하고, 변화무쌍(유행)과 픽션이 뒤섞인 중국 전란기에 대응해 고려는 불교에 의지하기로 했습니다.
    1236년(고종 23)부터 약 15년간 강화도 선원사 등지에서 『대장경』(신앙 경전 총 서적) 목판 새기기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 제작·보관 과정: 8만장 넘는 경전 목판(팔만대장경)은 전국 사찰 장인, 수도사, 모연(기부), 여성·상민·아이까지 모두 머리카락, 옷감, 쌀, 나무까지 내어 한 글자 한 글자 새겼다는 구체적 기록(태안・해남 사원문, 해인사 전통)에서 확인됩니다.
    몽골 침입에도 목판이 보관된 곳은 끝끝내 함락되지 않아 오늘날에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 ‘기도도 전략’, 저항도 신앙: 최씨 무신정권, 왕, 불교 지도자, 관리, 군사, 백성 모두 대장경 봉안/기도/절 개원 등의 의식을 통해 일종의 ‘정신전’ ‘사회적 응집전략’까지 세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불교사・전쟁사 논문).
“나라가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백성의 손, 장인의 손, 그리고 꿈꾸는 자의 마음을 빌려라.”
– 해인사 대장경기록 해설

4. 고려의 환도 – 포기하지 않은 귀환의 전략

  • 전쟁과 평화 교섭: 몽골은 1250년 이후 전면전 감소, 역병과 내란을 겪었고, 고려 역시 내부 피로, 정치 혼란, 환도(還都: 개경으로의 귀환)에 대한 요구가 커졌습니다.
    일부 무신과 왕족은 “강화도에만 갇혀 있을 수 없다”며 항복(1260년)과 평화 교섭, ‘화해와 귀환’ 현실 노선을 추진했습니다.
  • 1270년 최씨 무신정권 붕괴 후 고려는 조빙(朝聘: 사신 파견) 등 대외협상으로 왕실·조정 복권, 문화/경제적 회복을 모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귀주성, 제주 삼별초 항쟁 등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져 몽골에 대항하는 ‘민중 전략, 지방 방어전’이 계속됐다(삼별초 기록, 제주 민속 연구 등).
  • 몽골-원과의 결혼 동맹, 행정/군사 제도 변화 등 전략적 융합, 외교적 흔적이 문화/유물/행정기관에서도 확인됩니다.
“포기하지 않은 땅,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었기에 강화도의 추위를 견딘 것이었다.”
– 강화 천도기념비 해설문

참고자료

  • 첫~6차 몽골 침입, 강화도 천도 및 방어 전략,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 피난민의 생존 등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 국립중앙박물관·해인사 대장경판 해설, 강화역사관, 삼별초 유적, 토크멘터리 전쟁사·불교문화재 해설, 최신 논문자료 등에서 근거를 찾았습니다.
  • 최씨 무신정권(최우·최항·최의·최항 등) 주요 인물의 전략, 정책과 외교는 불교사와 무신집권기의 연구에서 팩트 체크했습니다.
  • 문화유산/목판·보관·기술, 군사적/정치적 의사결정은 모두 공식 사서 및 학자 연구에 맞추었습니다.

몽골의 끝없는 침공, 그리고 고려의 수십 년 인내와 전략, 팔만대장경에 남은 오랜 기도와 사람들의 손길까지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무엇이 진짜 '지킨다'는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