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인간 진화와 현대 사회의 해답
📑 목차
우리는 왜 다정함에 주목해야 하는가
우리는 흔히 경쟁을 인생의 본질처럼 받아들입니다. 학교에서는 성적을 두고 경쟁하고, 직장에서는 실적과 승진을 두고 경쟁합니다. 더 강해야 살아남고, 더 빠르게 움직여야 뒤처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사회 전반에서 듣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주 인용되는 개념이 다윈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오랫동안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를 ‘힘이 센 개체가 살아남는다’로 이해했지만, 다윈의 본래 뜻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존재가 살아남는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살아남고 번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힘이 세고 공격적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비밀이 있었을까요?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이 질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바로 다정함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힘센 개체가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신뢰하며 함께 살아가는 성향을 가진 집단이 결국 더 멀리 갈 수 있었습니다.

🧬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밀, 다정함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핵심 개념은 자기가축화 가설(Human Self-Domestication)입니다. 가축화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동물을 길들이는 과정을 말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간이 스스로를 길들이며 진화했다는 주장입니다. 즉, 공격성과 폭력을 줄이고, 친화력과 협력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늑대와 개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수만 년 전 인간과 늑대는 접촉하며 공존했습니다. 이때 모든 늑대가 인간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화적인 성향을 가진 늑대만이 인간 곁에 머물 수 있었고, 결국 이들이 현대의 개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억지로 길들인 것이 아니라, 친화적이고 다정한 성향이 자연스럽게 선택된 결과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비슷한 사례로 러시아의 은여우 실험이 있습니다. 과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는 수십 년간 오직 온순하고 다정한 성향을 가진 여우들만 선택해 교배시켰습니다. 세대가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여우들의 귀가 축 처지고, 꼬리가 말리며, 외모와 행동이 점점 개와 닮아갔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다가와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성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신체적·유전적 변화까지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다정함이 진화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보노보와 침팬지, 다정함의 힘을 증명하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은 침팬지와 보노보입니다. 두 종은 유전적으로 98.7%나 같지만, 사회 구조와 행동은 극적으로 다릅니다.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사회를 이루며 서열이 뚜렷합니다. 힘이 센 수컷이 지배권을 쥐고, 때로는 경쟁자를 잔인하게 공격하거나 새끼를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폭력이 사회를 지탱하는 방식인 셈입니다.
반면 보노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집단을 운영합니다. 보노보 사회는 암컷 중심이며, 서로를 보살피고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갈등이 생기면 공격이나 살인으로 이어지는 대신, 스킨십과 성적 접촉으로 긴장을 풀어냅니다. 지금까지 보노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보고는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닙니다. 보노보는 다정함과 협력을 통해 집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했고, 이는 생존에도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인류가 침팬지보다는 보노보와 비슷한 진화 경로를 걸었기에 지금처럼 번성할 수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다정함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 인간의 얼굴과 몸에 새겨진 다정함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정함이 우리 진화의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얀 공막입니다. 눈동자를 둘러싼 흰자위가 뚜렷한 덕분에, 우리는 상대방의 시선 방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협력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했고, 집단 생활에서 큰 이점을 주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얼굴은 점점 동안화되었습니다. 즉,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부드럽고 덜 위협적인 형태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는 상대방에게 친근감을 주고, 갈등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줍니다.
호르몬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은 신뢰와 유대를 강화하고 공격성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BAZ1B 유전자가 인간의 자기가축화와 관련이 있다는 연구도 발표되었습니다. 이 유전자는 얼굴 형태와 사회성에 영향을 주는데, 다정함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다정함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에 가깝습니다.

⚖️ 다정함의 역설: 가장 온화한 동시에 가장 잔혹한 존재
흥미로운 점은, 인간이 가장 다정한 종이면서 동시에 가장 잔혹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집단 안에서는 서로를 돌보고 협력하지만, 외부 집단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 전쟁과 학살은 이러한 양면성을 잘 보여줍니다.
하버드대의 리처드 랭엄은 인간의 공격성을 반응적 공격과 주도적 공격으로 구분했습니다. 반응적 공격은 순간적인 분노와 충동에 따른 폭력이고, 주도적 공격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입니다. 보노보는 반응적 공격이 거의 없고, 침팬지는 두 형태 모두를 보입니다. 인간은 반응적 공격은 줄였지만, 주도적 공격을 발전시켰습니다. 즉, 우리는 협력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정함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다정하기 때문에 집단을 단단히 묶을 수 있었지만, 그 힘이 때로는 외부에 대한 폭력과 차별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다정함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 오늘날 사회에서 다정함이 필요한 이유
현대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불확실합니다. 팬데믹, 기후 위기, 전쟁, 불평등 같은 거대한 문제들은 개인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다정함은 생존 전략으로서 다시 주목받습니다.
기업 연구를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있습니다. 능력 있지만 차가운 사람보다, 능력 있고 따뜻한 사람이 더 신뢰와 영향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조직 내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실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파트너를 원합니다. 정치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가 유지되려면 시민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기본적인 다정함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또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다정함은 개인의 행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작은 친절을 베풀면 뇌에서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고, 불안과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타인을 도우면서 자신이 더 안정감을 얻는 것이지요.
🌱 다정함은 훈련할 수 있다
다정함은 타고난 성격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훈련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낯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짓기, 불편한 상대에게도 존중하는 언어를 사용하기, 온라인 공간에서 상대를 비인간화하지 않기 같은 작은 습관이 다정함의 출발점이 됩니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이런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뇌가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고, 다정함은 자연스럽게 몸에 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약점’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으로 바라보는 관점 전환입니다.
📚 문화와 철학 속의 다정함
다정함은 과학뿐 아니라 문화와 철학에서도 꾸준히 강조되어 왔습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혼돈스러운 다중우주 속에서 결국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들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선택하는 용기”를 강조합니다.
이해인 작가의 글에서는 다정함이야말로 타인을 신뢰하게 하고,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에서도 다정함의 힘을 증명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2001년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숨진 故 이수현 씨의 이야기는 한국과 일본 양국 시민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는 국적이나 이익을 따지지 않고, 다정함으로 행동했습니다. 이 사건은 양국 관계 속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서로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정함은 국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 결국 다정함이 이긴다
우리는 흔히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살아남은 것은 힘센 자가 아니라 다정한 자였습니다. 인간은 다정함을 선택하며 진화했고, 그 결과 협력하고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위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냉소와 혐오가 아닌 다정함과 연대가 필요합니다. 경쟁이 아닌 협력이야말로 인류의 다음 단계를 열 수 있습니다.
다정함은 단순히 착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자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우리가 다정함을 연습하고 실천할 때, 사회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작은 친절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고, 누적된 다정함이 공동체를 지탱합니다.
“우리는 하던 대로, 살던 대로 사는 종이 아니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변화를 만들어온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다정함입니다.
📚 참고 서적 리스트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부키, 2021) - 인간 자기가축화 가설과 다정함이 인류 생존 전략이었음을 다룬 핵심 저서.
- 드미트리 벨라예프(Dmitri Belyaev), 여우 길들이기 실험 연구 - 은여우 실험으로 알려진 고전적 진화 생물학 연구. (국내 번역 단행본은 없으나 여러 진화심리학 교재에서 소개됨)
-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 『우리는 왜 폭력에 끌리는가(Demonic Males)』 (공저: 데일 피터슨, 김영사, 2003) - 인간과 침팬지의 폭력성을 비교하며 주도적 공격 개념을 제시.
- 리처드 랭엄, 『불로 만든 인간(Catching Fire)』 (사이언스북스, 2010) - 인간 진화와 음식, 사회성의 관계를 탐구한 저서.
-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 『보노보, 평화의 유인원』 (궁리, 2008) - 보노보 사회의 협력과 평화적 행동 양식을 깊이 있게 설명.
- 프란스 드 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Age of Empathy)』 (물푸레, 2010) - 공감과 협력, 다정함이 인간 사회를 어떻게 지탱하는지 논증.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 협력과 상상의 힘이 인류 문명을 만든 핵심 요소였음을 서술.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 소설 속에서 “다정함의 용기”라는 주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현대 문학 사례.
- 이해인 수녀, 『꽃자리에서』 (분도출판사, 2019) - 일상의 다정함과 인간 관계의 힘을 따뜻하게 풀어낸 수필집.
- 더 읽어볼 것 : 보노보와 나는 무엇이 다를까? 구별점은 ‘이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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