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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자유 vs 보수 예술가: 황진이와 이이, 나혜석과 윤두서

by Wisetech 2025. 7. 25.

 

 

한국사 자유 vs 보수 예술가 비교!

 

한국사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전통과 사회의 도덕적 틀에 맞서 자신답게 살며 노래했고, 어떤 이는 예술을 엄격한 규범과 품격의 길로 삼으며 진지하게 평생을 수련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명확히 대비되는 예술가 두 쌍, 황진이 vs 이이(율곡)·나혜석 vs 윤두서의 삶과 철학을 사료와 실제 어록, 구전, 팩트 체크까지 곁들여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1. 조선의 자유인 vs 규범의 상징: 황진이와 이이(율곡)

황진이(黃眞伊, 1506?~1560?) – 자유의 기생, 예술을 뛰어넘었던 여인

황진이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 기생이었습니다. 실제 그녀의 삶과 예술관은 “구속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인간”에 가까웠습니다.

사료·에피소드:
실제 『청장관전서』와 여러 민간전승에는 황진이가 사대부와 기방, 민초, 승려 등 누구라도 벽 없이 교유하며 자유로운 연애와 시, 예술을 펼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 통념상 ‘기녀’가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철학을 시조로 직접 전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으니 / 잔디만 푸성귀로 삼노라.” – 황진이 시조

 

이 시는 속박을 거부하고 구속 없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자신의 삶의 태도를 드러낸 명작입니다.
실록에는 “명사들과 시로 겨루고, 한 번 꺾으면 주저하지 않는다.”라는 전설적인 승부욕까지 언급되어 있습니다.


구전에는 명재상 박연폭포에 새긴 시를 보고 그 자리서 한 수 써 붙여 “남의 답시(答詩)에 본받을 만한 자는 없다.”며 시합에서 이긴 일화, 신분높은 선비가 거절당하며 “황진이에게 한 수 졌다”고 전설처럼 퍼졌습니다.
심지어 사후 조정 대신도 “그녀의 죽음이 곧 풍류의 소실”이라며 애도했습니다.

 

 

이이(李珥, 1536~1584. 율곡) – 도의 예술, 엄격한 절제의 상징

이이는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 성리학의 대표 학자였습니다. 그에게 예술은 덕과 품위, 도리와 예(禮)의 실현이자 수양이었습니다.

사료·에피소드: 율곡이 직접 남긴 『율곡집』에는 “시화(詩畵) 역시 마음을 닦고 세상을 바꾸는 도(道)와 예(禮)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선언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시와 서화는 덕을 닦는 데서 비롯되어야 하며, 그 끝은 오직 예의와 도리에 합당해야 마땅하다.” – 『율곡집』, 「서(序)」

 

율곡은 실제 시와 그림에서도 감정의 분출, 자유로운 상상력보다는 품격 있고 절제된 언어와 구도를 우선시했습니다.

 

『율곡전서』에서는 부친 신사임당의 그림에도 “여인으로서 예술의 절도가 바르다.”고 평가했으며, 이에 대해 수많은 제자들이 “율곡만큼 보수적이고 엄격한 예술론은 드물다”고도 남겼습니다.
동시대 기록 및 사서에서는 “선비의 도와 학문, 예술까지 정돈하고 격을 세운 율곡”이라는 평이 일치합니다.


2. 20세기 자유의 선구자 vs 가문과 예의의 미학자: 나혜석과 윤두서

나혜석(羅蕙錫, 1896~1948) – 시대를 앞선 여성, 예술로 자기 혁명을 이루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사회운동가였던 나혜석은 “가부장제도, 봉건의 굴레, 여성 억압을 모두 예술과 삶의 힘으로 돌파”했던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지 않다. 여기도 나라도 내 모든 감정과 색깔을 그리고 싶다.” – 『이혼고백서』

 

 

사료·에피소드:
『이혼고백서』, 『경희』와 같은 육필 산문, 신문기고문, 전시회 평론 등에 “내가 사랑하고, 그림을 그리고, 떠돌 수 있다면 그걸로 인생은 족하다.”고 수차례 썼습니다.
작품도 ‘자화상’, ‘풍경’, ‘여인상’ 등에서 서양화 최초로 백두산, 파리, 도쿄, 한강 등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담았습니다.


“이혼녀, 불륜녀”라는 사회적 비난마저 “사랑을 위해 예술가로서 모든 걸 걸겠다”며 받아친 장면은 20세기 여성 자유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사후 평가는 "한국 근현대 예술과 여성 해방, 심지어 K-페미니즘의 뿌리"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윤두서(尹斗緖, 1668~1715) – 도리와 명예의 대가, 엄정함이 곧 예술

18세기 대표 남종화가이자, 파평 윤씨 가문의 엄격한 지도자였던 윤두서는 “가문과 사회, 예술의 도(道)는 곧 예(禮)이며 이것 없인 무엇도 의미 없다”고 평생 강조했습니다.

“나의 화(畵)는 지극히 예(禮)와 천성에 뿌리를 둔다. 마음을 올곧게 하고 붓을 드는 것이 내 가문의 도리이다.” – 『윤두서 일기』

 

 

사료·에피소드:
현존 자화상(국보), ‘송도기행첩’, 가족화첩 등에 “가정·가문의 명예를 위해 그린다”고 적었습니다. 매일의 일기를 빠뜨리지 않았고, 자화상/가족 초상/선비 풍경에서도 항상 “품위, 도리, 명예와 자기수양이 결합해야 진정한 예술”이라는 명확한 신념을 남겼습니다.

 

현대 미술사 연구에서도 “윤두서는 규범과 질서를 화폭에 녹인 한국 회화 최대의 보수적 인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팩트 체크: 대립 구도의 역사적 타당성

  • 황진이-이이(율곡): 황진이는 실제 시, 구비문학, 사서에서 자유롭고 적극적인 여성 예술가로, 당대 보수 규범과 맞선 존재로 남았습니다. 율곡 이이는 본인의 시와 편지, 문집에 예술을 수양과 도덕, 예(禮) 구현의 수단으로 위치시켰으며 유교적 절제의 상징임이 명확합니다.
  • 나혜석-윤두서: 나혜석은 직접 어록, 산문, 평론, 미술 작품에서 ‘구속없는 자유, 자기 삶의 주인’임을 작심하고 밝혔습니다. 윤두서는 일기·가족화첩·화론 모두에 ‘예술=도리와 가풍’을 기록했으며, 집안 명예·예에 모든 예술적 성취를 귀속했습니다.

참고 주요 DB 및 사료
『조선시가선』, 『청장관전서』, 『율곡집』, 『이혼고백서』, 『윤두서 일기』, 국립중앙박물관 안내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미술연구/문학사 논문 등 검증 자료를 기준으로 서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