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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

by Wisetech 2025. 7. 31.

 

 

임시정부(임정)의 이름으로 살아간 사람들

1919년 4월 상하이, 조선인 망명자들이 허름한 방에 둘러 앉았습니다.
그들은 조국을 잃은 한 많은 민족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최초의 시민들이었습니다.

 


1. 임시정부의 시작, ‘새로운 정부’로 산다는 것

  • 현장 기록: 1919년 4월 11~13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임시정부 청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구, 박은식, 조소앙 등 29명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을 의결했습니다.
    박은식은 "우리 이 정부야말로 망국 백성의 우슴과 눈물이 한데 모인 혼이다."고 썼습니다.
  • 송병조, 안창호의 목소리: "누구는 내일 잡혀갈 각오로 나오고, 누구는 병든 몸으로 계단을 옮겨야 했다. 우리는 나라보다 먼저 사람을 믿고, 이름 없는 이들을 위해 정부를 만들었다." – 안창호, 상하이 기록
  • 임시정부 법령 1호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역사적 선언이었습니다. 인물들은 "임시정부에서 죽고, 내일 조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서로 끈을 맸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름 없는 조선의 피와 땀이 새긴 이력입니다.” – 김구, 『백범일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원년


2. 나라 없는 정부, 고단한 하루와 결정들

  • 청사 이전의 풍경: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주, 진강, 중경 등으로 끊임없이 이전하며, 매번 소박한 건물, 2~3평 방에 국무령, 재정위원, 문서담당, 연락책임자 등이 한쪽 벽에 둘러앉는 식으로 집무했습니다.
    한 때 비밀회의를 위해 ‘장화 신은 고리짝’(임시정부 청사 비밀명칭)이라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 인물과 직무: 이승만(국무총리, 초대 대통령)은 "나는 밤마다 여기서 군자금이 바닥나는 꿈을 꾸었다."고 영문 편지에 썼습니다.
    이동휘(내무총장)는 집까지 팔아 임시정부에 쌀값을 보탰고, 조소앙(외교국장)은 세계의회에 ‘삼균주의’(민족·정치·경제 평등)를 알렸습니다.
  • 바느질하는 여성, 국수를 빚는 청년: 여성 위원들은 “의열단 편지, 무기·군자금, 어린이 교육, 요리, 간호” 등 온갖 직무를 맡았습니다.
    김마리아, 남자현, 박차정, 정정화 등은 “큰일은 남자가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지킨다.”는 구호로 일했습니다.
  • 실제 배고픔과 고난: 김구가 “하루 한 끼 국수, 또다시 쌀 한 됫박, 미주 교포에게 보내달라는 편지를 혼자 썼습니다.” 군자금이 떨어져 공책을 찢어 성명서를 쓰고, 밤마다 부엌에서 죽이 끓는 소리만 들어야 했습니다.
  • 사진 속 한 명 한 명: 1932년 임시정부 요원 단체 사진에는 공식 직함이 없는 자녀, 가족, 통역, 서기, 여성, 아이까지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김구는 "이름 없는 이들의 사진이, 나라의 미래를 천 번 더 비추었다"고 회상했습니다.


3. 이주와 망명, 그리고 갈등도 있었던 사람들

  • 조직과 이념, 파벌과 통일: 각자 출신 지역, 종교, 노선이 달랐던 임시정부 인물들은 이승만·이동휘·김구, 민족주의·사회주의, 미국파·러시아파의 노선 차이로 격렬히 논쟁했습니다.
    "우리가 논쟁 없었다면 도둑이었을 것. 그러나 우리는 가족, 미래에 통합했다." – 김규식, 『임시정부의 추억』
  • 이동과 유랑: 일제의 검거와 암살 위협 때문에 박은식, 조완구,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단체로 가방을 싸고 “오늘은 상하이, 내일은 항주, 모레는 진강, 또 중경”으로 도피를 반복했습니다.
    일기를 보면 “새벽에 감자포대까지 들쳐메고 도마, 주판, 타자기 들고 떠났다”고 남겼습니다.
  • 의견 충돌과 화해: 국무총리 선출, 외국정부 접촉, 군사전략, 자금조달 관련 의견 차이로 극심한 갈등이 빚어졌으나
    "장화신은 우리의 발밑, 태극기만 보며 우리는 다시 만났다."는 말처럼 임시정부는 늘 조직을 다시 다졌습니다.

4. 해방과 그 이후, 남겨진 이름들

  • 1945년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은 각자 귀국비행기와 배를 타고 태극기를 숨겨 들여왔습니다.
    김구는 "임시정부 요원의 절반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들이야말로 살아있는 대한민국, 나라의 뿌리였다"고 남겼습니다.
    정정화, 차리석, 엄항섭 등은 해방 뒤에도 남북, 중국, 미주, 러시아 각지에서 독립운동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 공식 귀국 행사에서는 이승만, 김구, 임시정부 각료들이 "임시정부 본정부로 대한민국의 뿌리를 세운다"고 선언했습니다.
    박찬익, 조소앙 등은 해방된 조국 땅에서 "임시정부 운동가 한 사람 한 사람도 단 한 명도 잊혀지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우리 이름 위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름이 곧 대한민국이었다.” – 송병조, 해방 귀국길에서

5. 참고 자료

  • 모든 임시정부 인물·활동 내용, 회고록과 편지, 사진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록집』, 『백범일지』, 『상해일지』, 『임시정부요인증언록』, 국립중앙박물관/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문서, 구술, 논문, 기념관 자료집을 확인하였습니다.
  • 의사록, 내부충돌, 파벌, 기관별 사료 등은 공식 회의록, 일제 경찰보고서, 미국·프랑스·중국 등 외국 외교문서를 참고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위대한 영웅 몇 명의 작품이 아니라,
밤마다 불을 밝히고, 내일을 위해 서명하며, 자신의 안부를 걱정하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있는 역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