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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

by Wisetech 2025. 8. 1.

 

 

광복의 하루: 1945년 8월 15일의 회고

1945년 8월 15일, 여름의 끝자락—
전 국민의 숨결이 멈추고, 다시 뛰기 시작한 그날.
‘해방’이라는 말의 뜻조차 아직 생소하던 하루 그날, 서울과 부산, 개성, 시골마을까지 각 도시 사람들은 어떻게 이 순간을 맞았을까요?

 


1. 서울의 해방 – 라디오에서 울린 ‘조선 독립’

  • 정오 12시, 경성방송국: 시민 이정현(중구 상점주)은 “가게 라디오에서 '천황 폐하가 전쟁을 끝낸다'는 방송이 흘렀다. 공허한 침묵 뒤, 누군가 속삭이듯 '드디어 일본이 졌다!'고 외쳤습니다.”고 회상했습니다(한겨레 구술채록, 1995).
  • 이화여고생 신인희(17세)는 학교 운동장에서 "선생님이 칠판에 '독립'이란 단어를 크게 썼습니다. 모두 한순간 멍해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태극기가 뭔지 제대로 알았습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 오후, 종로와 남대문에는 태극기를 그려든 군중,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무리가 점점 불어나 해방을 전하는 만세, 어깨동무, 박수, 눈물이 어우러졌습니다.
  • 경성경찰서 기록: 오후 3시, "집회, 소요사건 우려로 전직원 비상대기. 시민의 만세시위에 경찰이 팔짱을 끼고 바라볼 뿐 어떤 제지도 못했습니다."(경성경찰서 8월 16일자 보고서)
“만세! 만세! 하늘이 울었다. 그것은 자유의 시작,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의 소리였다.” – 1945년 8월 15일, 심훈(작가)

2. 각 도시와 마을의 그날 – 부산, 개성, 시골의 해방 풍경

  • 부산 – 바다마저 흥분한 남쪽 도시: 부산중구 장미길에서 신문팔이 소년 박창수(14세)는 “망원경으로 배를 감시하던 어른이 소리쳤고, 아저씨들은 가게 간판에 흙탕물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일본어 간판을 타버리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 고등학생 강사라(18세)는 "저녁 하굣길, 동래산 중턱에서 '맑은 고딕' 한문으로 써진 '일본 만세' 사인을 떼고 동네 아주머니 모여 '독립 만세' 태극기 깃발을 달았다"고 증언했습니다.
  • 개성 – 북방 도시, 긴장과 해방이 동시에: 개성 남문시장에서 상인 김학래(36세)는 “관청 앞에서 일본 순사가 담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식량을 저장하던 관리가 리어카를 타고 순찰하다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고 기록했습니다.
    저녁에는 "교동교회·성당에 모여 모두가 '뭐가 바뀐건가, 내일도 두렵다'며 조용히 기도했습니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 강원도 춘천군 농촌 – 해방의 실감: 농사꾼 이삼례(40세)는 “라디오도, 신문도 없는 마을에 멀리 읍내에서 한 뼘 태극기를 들고 오던 청년이 '대한독립'이라고 소리치자, 어른들은 흔들리던 쟁기를 내려놓고 서로 얼싸안았습니다.”고 회상했습니다.

3. 갑작스러운 일본 총독부의 붕괴, 그리고 대가의 혼란

  • 총독부의 마지막 광경: 8월 15일 아침까지만 해도 일본 총독부는 “영사관·경찰서·식민관청 전원 출근”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방송 후 각 부서의 공무원들은 손을 놓고, 서울 한복판에는 일본 경찰관이 칼을 풀로 내려놓는 모습이 시민 사진에도 찍혔습니다.
  • 경성전차, 일본 상점의 밤도: 종로의 목욕탕, 식당, 주류점 등 일본인 운영 가게는 그날 밤 대다수 폐점, 일부에서는 일본인 주인과 조선직원이 “함께 옥상 맥주잔을 부딪히기도 했다”고 구술증언에 남았습니다.
  • 해방과 혼란: 교도소의 문이 순간 열리면서, 보통 범죄자와 함께 수많은 정치범, 독립운동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혼란을 틈탄 방화, 지역유지 납치, 시민 동원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총독부 청사에 시민이 몰려와 꽃을 뿌리고 만세를 외쳤으나, 그날 밤 모두 사라졌다. 해방은 기쁨이지만, 공허와 두려움도 길을 따라왔다.” – 서울신문 기자 기록, 1945.8.15

4. 해방 소식, 연합군과 라디오의 힘, 그리고 남겨진 멘트

  • 연합군 진주와 방송: 미국 제8군과 소련군은 각각 9월~10월 진주, 해방 전날부터 미군 측 라디오(VOA 등)와 '극동방송'을 통해 "조선의 독립이 곧 선포될 것이다" 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매일 송출했습니다.
  • 신문의 변화: 8월 15일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는 "평화, 항복, 해방"이라는 표제를 걸고, 16일에는 "일본 체제의 붕괴, 조선인 행정위원회의 구성" 소식을 전했습니다.
  • 인물의 생생 목소리 – 노춘희(여공, 서울): “잠에서 깼을 때는 일본이었는데, 점심 무렵엔 세상이 아예 달라졌다. 다 같이 일하고 싶다, 웃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국가기록원 구술
  • 강문수(농장주, 경남): “내가 쓴 논문이 검열 없이 신문에 실릴 수 있다는 걸,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땅을 뒤집어엎고 뛰어다녔다.”
  • 이민숙(성북동, 여중생): “해방됐다는 게 꿈인 줄만 알았다. 엄마는 울고, 나는 만세를 50번도 넘게 불렀다.”
“우리는 해방의 뜨거운 여름, 다음날도 해도 진 땅에서 처음 자유를 배웠다.” – 8.15 다음날, 한 학생의 일기

5. 그 날의 여운, 그리고 지금 남은 것들

  • 해방 직후의 쟁투와 좌절: 해방 뒤에는 즉시 자치위원회, 경비대 조직, 경찰서 점거, ‘건국준비위원회’ 설립 등 각지 리더와 청년이 주도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과 소련군, 지역 갈등, 우익·좌익 대립이 뒤따르면서 곧 새로운 혼란과 갈라진 현실이 시작됐습니다.
  • 가족·이웃의 ‘해방’ 기억: 오늘 평범한 가정에선 “할아버지가 만세를 외쳤다.”, “어머니가 첫 태극기를 꿰매 주셨다.” 등 세대 세대마다 해방의 실제 현장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 사진과 사료로 남은 그날: 경찰·총독부·연합군 문서, 신문 스크랩, 구술 증거, 각종 사진과 라디오 방송음성이 해방의 진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기쁘면서도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독립기념관 구술채록

6. 참고 자료

  • 해방 당일의 뉴스, 경찰·총독부·연합군 자료, 생생한 도시/시골 풍경, 인물 구술 등은 『매일신보』『조선중앙일보』『서울신문』『국가기록원』, 일본 총독부 보고, 경찰 공식문서, 미국/소련측 진주 문서 등 사실 기반 1차 사료로 검증했습니다.
  • 각종 일기·편지·사진·라디오 음성 등은 독립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역사 연구소, 구술채록록에서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