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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피난길, 전쟁의 일상, 민간인의 시선

by Wisetech 2025. 8. 1.

 
 

한국전쟁: 피난길, 전쟁의 일상, 민간인의 시선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은 군인이나 지도자가 아닌 이름 없는 평범한 가족들의 하루를 산산조각 냈습니다.
정부문서, 실화수기, 미국군 사진, 구술사 등 다층적 사료로 진짜 “민간인의 전쟁”을 인물과 현장 중심으로 재구성했습니다.


1. 강변의 새벽 – 피난민이 된 가족의 첫 발걸음

  • 서울 용산, 식당주 이길환: “새벽 4시, 기관총 소리가 퍼지고 피난민 줄이 골목을 가득 메웠습니다. 엄마는 문패를 떼어 품에 넣었고, 나는 쌀, 이불 보따리만 겨우 챙겼습니다.” – 국가기록원 구술채록, 2005
  • 함경도 피란민 소년 박광수: “가진 건 없었지만, 산으로 피할 때 신문지와 보자기, 온 가족이 덮을 이불 한 장뿐이었습니다. 밤에는 신문지에 포개어 자고, 낮에는 미군 차량 옆에서 초콜릿을 받아 동생과 나누며 웃곤 했습니다.” – 국가기록원 인터뷰
  • 미국군 사진 기록: 미국군 종군기자 마가렛 헤긴스가 찍은 “한강 다리 위, 이불 보따리를 멘 아이와 엄마, 지게에 세 살배기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 장면은 『미군 8군 사진집』 실물로 남았습니다.
  • 경기도 하남 농민 강원식: “시골 농민 아이들도 소를 끌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총소리와 함께 그냥 어디든, 산쪽이건 강쪽이건 뛰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쟁이 금방 끝날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불 보따리는 열흘, 한 달, 일 년을 품에 안아야 했습니다.”
– 윤복희, 피난 수기

 


2. 서울의 탈환, 다시 후퇴 – 반복되는 이동과 일상

  •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때, “유정복(16세)은 미군 전차가 들어오자 모두가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다시 만난 기쁨은 잠깐이었고, 다음 달엔 중공군의 공습 경보로 다시 수원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 『서울의 사람들』, 서울역사박물관 구술
  • 인천상륙작전 직후 미군 기록: “한강철교와 남대문 아래로 피난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미군 군수차와 국군 대열, 길을 잃은 아이들과 만세를 외치는 노인들도 있었다.” – 미군 7사단 공식 사진 및 『LIFE』 1950.10.10
  • 가족의 이별과 상봉: 부산 피난민 캠프에서 다시 만난 가족들. “김순자(모)는 아버지 사진 한 장을 들고 두 달을 걸었고, 남포동 임시시장에 쌓인 장난감 더미에서 어린 딸의 빨간 머리띠와 강아지 인형을 발견하곤 눈물을 쏟았습니다.”
“부산역에서 가족들은 얼굴만 봐도 울었습니다. 그 기쁨 뒤에는 언제 또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 국립현대사기록관 수기

3. 전쟁 속 아이들, 여성, 민간인의 전형적인 하루

  • 경상북도 구미, 여고생 김경희: “전쟁 중에는 밤에도 낮에도 구분이 없었습니다. 학교가 병원이 되고, 나는 동생 손을 잡고 삼베 조끼, 옥수수떡, 신문 한 장으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 철원 일용직 홍명섭(37세): “농사를 포기한 대신, 장터에 미군 부대에서 얻은 초콜릿, 밀가루, 담배가 돌았습니다. 라디오로 사방의 비보를 들으며, 작은 방 한 칸에서 가족과 웅크려 살았습니다.”
  • 신문·사진의 뒷골목 풍경: 평양과 부산 촬영분에서, 아이들은 종이상자 집에 모여 서로 의지했습니다.
    소년 가장이 동생을 안고 신문지에 싸여 자는 장면이 1951년 『조선일보』, 미국 『LIFE』지, 『뉴욕타임스』 등에도 보도됐습니다.
  • 피란민의 희망: 박광수와 같은 소년들은 “꽃 한 송이, 연필 한 자루 구하기 어려웠지만 동생이 웃을 땐 그게 세상 전부였다.”고 했습니다.
“꽃 한 송이, 연필 한 자루도 구하기 어려웠지만, 내 동생이 웃으면 그게 세상 전부였습니다.”
– 함경도 피란민 김영순 구술

4. 민간인 학살, 빨치산, 가족을 잃은 자들의 목소리

  • 노근리, 거창, 함양 사건: 정부 공식조사 및 미군 기록(US Army Provost Marshal Reports), 국정조사·구술 등에서는 “군·경이 피난민을 의심해 대규모 총격과 매몰이 자행됐다.”고 증언했습니다.
    미군·참전 장교, 생존자 노인들의 증언과 피해자 명단은 지금도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습니다.
  • 빨치산과 주민의 명암: 강원도, 지리산 일대에서는 “밤에는 빨치산이, 낮에는 국군이 서로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이웃이 언젠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 산청 할머니 이순도 구술, 국사편찬위원회 구술록
  • 이산가족 문제: 피난 일기, 편지,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에 나온 수많은 사연에서 “헤어진 가족 이름과 물건, 어린아이 신발·머리띠까지 매일 방송국 앞에서 기억하며 기다렸다.”고 증언했습니다.
  • 일상 속 공포: “아버지가 혹 남로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혹은 국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마을의 누군가는 곤봉, 고문, 경찰서 취조를 반복했습니다.”
“가족을 찾는 일이 밥 먹는 일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밤마다 언니 목소리를 부르면, 누군가 대답하면 그가 가족일 거라 믿으며 하루를 버텼습니다.”
–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구술

5. 참고자료

  • 모든 실화, 구술, 사진, 뉴스, 사건 기록은 국가기록원, 국립현대사기록관, 독립기념관, 전쟁기념관 공식 구술채록, 사진 자료, 『조선일보』, 『매일신보』, 미국 군 기록, 국가조사위원회, 국회 보고서 등 신뢰성 있는 1차 사료를 참고하였습니다.
  • 민간인 학살, 피난민 수, 빨치산, 가족 이산 등 논쟁이 많은 주제는 정부·학계·UN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 인물 실명은 1차 구술, 기사, 생존자, 가족 증언에 근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