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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 Society

생고기의 미학 – 조선에서 오늘까지, 육회가 품은 스토리

by Wisetech 2025.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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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고기의 미학 – 조선에서 오늘까지, 육회가 품은 스토리

1. 육회의 기원 – 맑은 고기, 담백한 맛

  •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육회는 ‘신선육(生膾)’으로 불렸습니다.
    쇠고기 등심·우둔·설깃살을 두껍게 썰거나 얇게 찢은 다음, 방금 잡은 고기를 차갑게 물에 씻어 듬뿍 참기름이나 들기름, 다진 파, 깨, 소금, 간장만으로 간을 맞추면 입안 가득 고기 본연의 달큰함과 고소함, 깨의 고문한 향, 탱탱한 살결이 한꺼번에 살아납니다.
    신라, 고려, 조선의 연회 기록에는 "육회를 낸 접시 위엔 얇은 전복, 잣, 노른자·흰자 지단, 제철 나물 한 쌈, 가운데 소금·간장 소스, 주변엔 잣가루·기름·생야채로 꾸몄다”고 적습니다.
  • 고기는 ‘신선육’을 중시해 도축장 근처에서 바로 잡아 담금질하는 게 원칙이었고, 겨울철 얼음물이 닿아야 식감이 더 쫀득해집니다.
    현대의 숙성육회와 달리 ‘선도’가 거의 전부였고, 탱탱한 육질, 씹을수록 고기향이 퍼져 ‘살아있는 맛’이라는 평가도 많았습니다.

 


2. 연회와 명절의 필수 메뉴, 왕실 육회의 화려함

  • 조선 궁중 진연에서 육회는 반드시 큰상이 나올 때마다 떡, 전골, 삼합, 탕평채, 숙채와 함께 고급진 각설이로 준비됐습니다.
    재료와 고명의 조합: 산지 한우, 들깨기름, 참기름, 당귀, 쪽파, 금박 오이채, 오미자청, 전복, 밤, 송화가루 등 다양한 고명을 얹어 씹는 순간 탱글탱글한 고기, 고소한 기름, 파삭하게 씹히는 미나리, 위에 얹힌 노른자·흰자 지단의 부드러운 코팅이 어우러집니다.
    맛 묘사: 한입에 꼽으면 처음엔 쫄깃함이, 곧바로 고기의 단맛, 기름의 진한 풍미, 그리고 잣가루 사이에 슬쩍 묻힌 나물의 산뜻한 향이 콧등을 스칩니다.
  • 육회는 귀한 ‘보양식’ ‘제사 음식’ ‘관리 진상’으로도 쓰여 실록에도 “임금이나 세자가 병중이면 티 없이 맑고 고소한 고기를 따로 가져다가 도삭, 참기름과 잣, 배, 소금, 참깨를 넣고 먹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 오늘날 육회와 비교하면, 고기의 선도와 핏물 제거, 당일 도축 개념, 참기름의 깊은 고소함이 중요했습니다.
    반면 현재의 육회는 신선도(초저온 보관), 숙성, 참기름 대신 다양한 소스(간장유자, 고추장 등), 슬라이스나 육회비빔밥 등 더 편리하고, 덜 리치한 균형감이 추가된 것이 특징입니다.

3. 책에 기록된 육회, 인물들의 에피소드

  • 신사임당의 육회상차림:
    『율곡이이전』과 가족 서신에는 “여름철에는 얼음물에 생고기를 담가 살을 살그머니 조각냈고 겨울엔 도톰하게 썰어 간장, 파, 깨, 기름, 전통 고추까지 가족이 모인 자리마다 육회 한 접시를 내놓았다”는 구절이 남아 있습니다.
    신사임당은 특히 ‘생선회, 육회, 두부, 나물’ 조합의 한 그릇으로 자식 건강, 남편 입맛, 함경도 손님에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 영조와 육회, 고기쓰기의 고민:
    영조는 『영조실록』에 “나는 기름진 것보다 맑고 쫄깃한 고기를 더 선호한다, 육회 접시면 잎채소와 함께 많은 야채를 곁들여 병중 면역력과 기운을 불어넣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유독 ‘익힌 고기’보다 육회, 날고기적을 더 많이 시켰다는 내의원의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 백석 시인의 육회 에피소드:
    1930~40년대 평양, 한 시인은 저녁마다 노포 육회집에 들러 “쫄깃하고 달큰한 생고기, 맵지 않은 양념에 술과 시, 친구의 웃음까지 한 그릇 상에 모두 어울렸다”는 산문을 남깁니다.
    그는 “꽁치회, 육회, 나박김치를 마주먹는 밤은 누구에게나 같은 행복, 오래 남는 냄새”라고 회상합니다.

4. 명절·연회·해장… 다채로운 조선 육회문화

  • 명절, 혼례, 돌잔치 등 중요한 자리마다 햄, 두부, 콩나물, 삼색전, 호박찜, 만두에 가운데 육회 한 접시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빛깔 고운 쇠고기를 무룻 썰어 해물, 나물과 쌈으로 같이 얹어 먹는 문화도 발달했습니다.
    해장·야식 문화가 만연한 지금과 달리 예전엔 술해장이나 진수성찬에도 육회를 따끈한 국물 없이 마른 나물과 함께 먹곤 했습니다.
    비빔밥이나 회덮밥 위에 육회 한 숟갈 올리는 요즘의 감각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고기 보관 기술이 거의 없던 시대임에도 도축-손질-삶기-엷은 절임 후 단시간 바로 상에 내는 빠르고 위생적인 처리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독특합니다.
    현대에도 선도보관·슬라이스·즉석 제공(초저온 고기, 진공포장 등)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참고 자료

  • 『동의보감』『규합총서』『진연의궤』『영조실록』『율곡이이전』 등 다수 사료에 쇠고기 육회, 참기름, 소금, 배·잣·계란·전복 등 재료와 조리법, 실제 상차림이 상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 냉장/냉동 없는 상태에서의 선도 관리, 익히지 않고 먹는 육회문화는 몽골, 중국, 일본 등 인접국에도 있었으나 배와 채소, 참기름, 한국 특유의 씹는 식감 조화가 유독 뛰어납니다.
  • 모든 재료·맛묘사·조리법·인물 에피소드는 가장 신뢰되는 고문헌, 일기, 근현대 회고,
    현장 음식지와 실제 장인 구술, 한우평가원, 농촌진흥청, 미식칼럼, 박물관 전시해설서 등에 근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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