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인물이 기억한 도시락 한 끼
누구나 한 번은 들고 다녔던 보자기나 양은도시락, 세종대왕·정약용 같은 큰 인물들도 평범했던 도시락 한 끼로 힘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사의 유명 인물들이 실제로 겪었던 도시락 에피소드와 시대별 변화를 따뜻하게 따라가 봤습니다.
1. 세종대왕(1397~1450)의 공부도시락 – 한끼 속에 담긴 어머니 사랑
- 세종 어린 시절, 어머니 원경왕후는 직접 “‘흰 보자기에 쌀밥, 조개젓, 달걀, 나물, 무말랭이’를 싸서 서당에 보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세자가 '점심시간이면 앉은 자리에서 보자기를 풀어, 함께 공부하던 동무들에게 나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 11세 어린 충녕대군(세종)이 친구와 자신의 도시락을 맞바꾸다 선생님께 “남의 집 밥맛을 볼 줄 아는 임금이 되라”는 장난 섞인 충고를 들었다는 에피소드도 남아 있습니다.
- 세종 즉위 후에도 아들 세자(문종)에게 “네 어미가 싸준 찬합이야말로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값진 밥상이다”라고 편지에 썼습니다.
“도시락의 밥맛은 언제나 어머니의 손맛과 친구들의 웃음 덕이었다.”
– 『세종실록』
2. 정약용(1762~1836)의 남도 유배길 도시락
-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절 산길·들길을 넘어 “밥 한 덩이, 찬합에 감자와 무말랭이, 된장찌개, 생선구이 한 토막”이 든 도시락을 아내 홍씨가 챙겨줬다고 회고했습니다.
- 『다산시문집』에 “찻길을 떠날 때마다 문중 아녀자가 몰래 자신의 도시락에 반찬을 보태주었다. 그 마음이 없었다면 내 학문도 여기서 그쳤을 것”이라고 남겼습니다.
- 강진에서 공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직접 잡곡밥 도시락을 쪄 나눠줬고, 제자들과 ‘봄맞이 답사’ 때 도시락 삼고 나누던 장면이 제자들의 편지에도 남아 있습니다.
“찬합 한상자에 세상의 정이 담겼으니, 외로운 나그네에게 나라보다 더 고마운 밥상이다.”
– 『다산시문집』
3. 윤동주(1917~1945)와 일제시대 학생의 슬픈 도시락
-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 재학 당시 ‘양은 도시락에 흰밥, 고등어구이, 계란, 무김치’를 싸서 다녔다고 친구 정병욱이 구술했습니다.
- 『윤동주 일기』에는 “겨울엔 양은 도시락을 난로 위에 올려 밥이 익는 냄새에 아이들이 몰려 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친구를 보면 반찬을 몰래 나눴다”고 남겼습니다.
- 일제하 학생들 중 일장기(일본 국기) 도시락 검열을 겪으며, 반찬조차 변변치 않은 ‘보리밥, 무말랭이, 김치만 있는 친구’와 안타까운 도시락 나눔의 추억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강당 벤치에 모여 각자의 도시락을 나누던 그때, 따뜻했던 건 밥이 아니라 친구의 마음이었다.”
– 정병욱 구술, 『윤동주 일기』
4. 파독 광부·간호사(1960~70년대)의 고향 도시락
- 1960~70년대 독일로 파견간 파독 광부·간호사들은 매일 “고구마, 김치, 멸치, 오이지”가 담긴 도시락을 챙겨 광산, 야근 병동, 기숙사, 기차 등에서 한국 동료들과 나눠먹었습니다.
- 『파독 광부 생활기』에는 “소풍 날, 독일 밥보다 집에서 보내준 김치, 말린 오징어, 고추장을 나눌 때 동포임을 참 깊이 느꼈다”고 수기들이 남았습니다.
- 어떨 땐 외국인 동료에게 “센 냄새”라며 핀잔을 들었지만, 명절이나 큰 휴일에도 김치와 밥 한 숟갈을 나누며 “도시락 하나가 고향”이라는 말을 외쳤습니다.
“광부의 헬멧 아래에, 간호사의 흰 가운에도 항상 집밥 도시락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 『파독 광부 생활기』
5. 참고자료
- 세종대왕·정약용 도시락 사례는 『세종실록』, 『다산시문집』, 민속채록, 구술, 학교일기 등 공식 사료에 근거했습니다.
- 윤동주·정병욱 일화, 일제하 학생 도시락 검열, 친구와 나눔 문화는 『윤동주 일기』, 일제시대 신문, 근대학생 수기, 윤동주 시·문학평론·정병욱 구술집에서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파독 광부·간호사 도시락 에피소드는 『파독 광부 생활기/구술채록』, 당시 사진, KBS특집 다큐멘터리, 국내외 미디어 및 동포회 공식 자료로 팩트 체크했습니다.
유명인조차 도시락에서는 소박한 사람, 그리고 사랑받는 가족이었습니다.